대한 개혁의 추진자, 이념적 투사로 자처하였다. 지적 계몽과 사회개혁을 지향하면서 구체제에 대하여 준열한 비판을 가하고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였다.
루이14세가 죽은 이후로 권위의 실추는 가속화되어 갔다. 필립 도르레앙(le duc d'Orléans) 의 섭정은 통제의 완화로 자유스러우면서도 퇴폐적인
사회비판
루소의 철학에서 핵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유란 가치이다. 홉스, 로크, 몽테스키외와 같은 루소 이전의 철학자들이 자유란 개념의 근거를 마련하고,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와 법에 관해 천착해 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루소처럼 “자
인간조건의 확립을 꾀한 그들은 제도의 혁명에 앞서 정신의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반기의 철학적 투쟁에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가 투사로서 싸웠고, 후반기에는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와 루소가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뚜렷한 진보와 변화를 노리는 의욕에 그 표현형식이 금방
대한 아쉬움과 본인 또한 그러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기이한 유전은 루소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 원천이었다. 2년 뒤 루소는 본격적인 방랑을 결심한다. 1728년 3월 14일 성문 밖으로 봄나들이를 나갔던 루소가 시간이 늦어 성문이 닫혀 버리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루소는 제때 안 들어왔다고
사회의 불평등적 체제를 대립시킴으로써 구체제(Ancien Regime)를 해체시키는 이론적 틀을 만들었다. 이렇게 자신의 사상을 통하여 낭만주의적 흐름의 시초를 제시하는 가운데, 루소는 그의 저서 {고독한 산책가의 몽상 Reveries du Promeneur solitaire}(1776)의 '제5의 산책'에서 "낭만적 romantique"이라는 표현을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