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단지 사건(1971.8)을 비롯한 도시빈민들의 생존투쟁도 치열해졌다. 그리고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이 예상보다 훨씬 높은 43.6%의 득표율을 보인데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1971.5.25) 야당 신민당의 의석이 종전의 44석에서 89석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여 박정희 정권을 불안하게 했다.
현대미술의 추이를 소개, 점검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는 국제진출의 기회도 잦아져 유수한 국제전에 참가하고, 이 일, 유준상, 오광수 등 전문 비평가들과 일본에 머물러 있던 이우환에 의해 튼실한 이론과 비평적 관점이 교환될 수 있었다. 가히 한국현재미술의 르네상스 시기라 할 수 있겠다.
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민족중흥과 정신적 근대화를 더불어 강조하면서 전통문화 보존, 발굴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전통으로의 회귀’ 현상에 미술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동안 미술의 국제화에 열중했던 추상미술이 1960년대 말 이후 한국적인 전통에 눈을 돌리며 민화, 색동, 한지 등을
미술품 감정은 근현대미술품 감정을 실시하고 있는 한국화랑협회와 한국미술품감정협회의 감정 양상에 따라 작고작가와 생존작가로 구분된다. 감정의 과정은 전체 토론으로 진행되며, 진위의 결정은 원칙과는 상관없이 감정위원 전원의 동의를 얻게 되며, 1인의 의의 제기만 있어도 최대한의 토론과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숙하게 보이는 연극대본을 쓴 데는 당대의 극장조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극장구조는 지붕이 뚫린 반 옥외 극장인데다 무대가 개방형이어서 앞면의 막이 없었으며 장치, 조명등은 사용되지 않았다. 연기자에게는 각자 맡은 대사만 주어졌으며 여성 역은 변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