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을 결정한 것은 미국의 동맹국이거나 강압 때문이 아님을 시사해주고 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월남파병문제에 대한 외교정책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지만 이 논문에서는 개인적인 생각을 위주로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씩 서술을 해나가도록 하겠다.
파병을 결정한 것은 미국의 동맹국이거나 강압 때문이 아님을 시사해주고 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월남파병문제에 대한 외교정책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지만 이 논문에서는 개인적인 생각을 위주로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씩 서술을 해나가도록 하겠다.
정치 절충도 시도했다. 회담 중에 박정희와 이케다 수상 사이에 “조속한 시일 내에 각 현안에 대한 원만한 타결을 보고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원칙에 서로 합의했다. 그러나 청구권과 관련해 양국은 서로의 입장을 좁히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일본은 한국에 대한 패전국이 아니므로 아무런 법적 배
유지하려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내치의 어려움을 통일문제로 돌파하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민족통일의 3대원칙으로 규정한 7.4남북공동성명과 6.23선언이라 불리는‘평화통일외교정책’이 제시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석상에서 중장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급서 하였다.
전쟁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못한 남북간의 분단, 대치상태는 한국으로 하여금 항상 안보의 위협 속에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게 만들었으며, 이는 또한 한국의 자주외교 행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에게 자주 외교를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역량은 매우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