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인 치적도 컸던 것이니, 375년에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백제서기(百濟書記)(국사)를 편찬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외교적인 교류도 활발히 전개하였고 특히 일본에 대하여는 각별한 선린관계를 맺었던 것인데 삼국사기 의 기록에는 빠져 있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는 자세한 내
시대에는 대륙과의 교류가 단절된 채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갔다. 이 시대의 유물로는 910년경의 《본초화명(本草和名)》, 984년에 저술된 《의심방(醫心方)》이 있다. 이 책은 중국의 《병원후론(病源候論)》, 한반도의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 등의 의학서
백제(百濟)로 고치고, 미추홀에 자리한 비류세력도 흡수하여 한강유역의 새로운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3세기 중엽 경에 와서 만한과 중국의 군현인 대방군(帶方郡), 낙랑군(樂浪郡)은 진한(辰韓)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전쟁을 하게 되었다. 목지국이 주동이 된 마한은 대방군을 공격하여
일본과 가까웠던 백제가 삼국 문화의 일본 전수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4세기에 아직기는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고, 뒤이어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가르쳤다. 6세기에는 노리사치계가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다. …(중략)… 고구려도 일본 고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세기 경에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관가가 가야 땅에 있었다고 내세우는 것은 그들이 터무니없이 역사를 조작한 것을 입증하고 있다. 바꿔 말해서 임나일본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왜곡> , 홍윤기, 학민사, 2001
(2)-1 광개토대왕비문 해석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의 광개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