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 난 이후 안록산, 사사명의 副將들은 각자의 군사력을 가지고 하북 3진에 웅거하였으며 ‘河北의 舊事’ 라고 하여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고 反唐적인 태도를 공공연하게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후 각지의 藩鎭은 차례로 唐朝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반역 번진화 되었으며 이에 대해 당 憲宗의 개
사의 제반사무를 보았다. 절충부의 총수는 약 600개소인데, 그 중 400은 수도부근에 배치하여 국도를 튼튼히 하고, 200은 변경에 주둔하여 국경을 굳게 하였다. 그리고 그 부병은 모두 중앙의 병부에 직속시켜 지방행정관과는 전연 통속관계가 없게 함으로써 지방정권의 강대화를 방지하였다. 국도를 지키
절도사였던 장수규의 假子였다가 그의 사후 이림보에 의해 평로절도사로 임명되었다. 742년에 범양절도사, 751년에는 하동절도사를 겸해 안록산은 세 개의 번진을 장악하였는데 그 휘하의 병력은 대략 18만으로 변경 바위병력의 37%에 달할 정도였다. 더욱이 절도사의 재임기간은 대략 2년 정도이지만 안
왕조의 중흥이 성공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당왕조의 중흥을 완성시킨 헌종과 그의 정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본론
(1) 헌종 치세의 상황
헌종의 정치적 개혁의 기반은 그의 선임자, 특히 덕종(德宗)에 의해 마련되어 있었다. 덕종은 번진에 대한 강격정책에 반발하여 일어
(전략)
당의 사회제도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토지제도로서의 균전제, 세제로서의 조용조, 군제로서의 부병제를 들 수 있다. 균전제는 농민들에게 구분전이라 불리는 최소의 생계유지 토지를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제도이다. 일정 지역의 농민에게 토지세와 현물세, 요역을 거두는 것이 조용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