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하고 해마다 풍년되어 다함께 ‘화락하는 즐거움(희호지락 熙볻?’을 누려갈 것이다.”(『세종실록』 26년 윤 7월 임인)
한 나라의 CEO로서 정신적 풍요 및 경제적 풍요를 동시에 갈구하고, 이를 실천해 나가겠다는 CEO의 이러한 ‘자기 선언’ 만큼 강한 메시지가 어디 있는가? 세종은 이상을 현
ⅰ겸재 정선(1676~1759)
-본관: 광주
-호: 겸재․난곡
-별칭: 자 원백(元伯)
-활동분야: 예술
①그는 어떤 화가 이었는가?
안견, 장승업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화가로서, 우리나라의 산천을 독자적 화법으로 그려내어 진경산수화풍을 확립시킨 동시에 진경산수화의 발달에 지대한 공로를 남긴 화
법을 잘 지키는 선량한 관리
탁무는 당시의 선량한 관리이므로 특별히 껴서 서술했다.
一面遣使至洛陽軍前, 囑岑彭招降朱?。
일면견사지냑양군전 촉잠팽초항주유
한편으로 사신을 낙양 군앞에 보내서 잠팽에게 주유를 항복시키기 부탁했다.
彭嘗爲?校尉, 持帝書入洛陽城, 勸?速降。
팽상위유교위
화평을 쓴 강세황은 취한 체로 판결을 내리는 수령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
당시의 공식 법정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비록 술이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 자리에서 판결을 해 주는 고을 수령을 옳다고 할 수 있다.
2. 분쟁과 분쟁처리
(1) 분쟁연구의 두 갈래
초기의 (법)인류학자
분쟁
법을 세웠으며, 958년에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고,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 였다. 또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968년에 혜거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의 국사, 왕사 제도의 문을 열었다. 국방 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고려의 영역을 서북과 동북 방면으로 더욱 확장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