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封建)이란 용어는 주(周)대의 국가체제를 가리킨 데서 비롯된 것으로 군현제도에 대응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서유럽 중세의 봉건제도는 봉토를 매개로 하는 봉주와 봉신 사이의 인간관계로서 계약 적이고 인위적이며, 대등한 주체자 간의 쌍무계약관계였는데 비하여 중국의 봉건제도는
조선조에 와서는 하나의 군현에 향약이라는 지방 유력자들 중심의 독자영역과 수령이라는 중앙왕권의 대표가 공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래가 다른 두 개의 권력 간에 미묘한 문제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당시 향약의 주도자들은 군현제와 봉건제의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봉건제에 대한 정치적 해석은 동아시아에서의 봉건제의 개념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봉건제에 대한 법제사적 해석이 대체로 유럽 중심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데 비하여 정치적 해석이 세계사적 관점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주종제와 봉제도를 유럽 특유의 현상으로 보려는 데 대해서 후
제도를 위하여 어떠한 여지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봉건국가는 근대의 "일원적 평면지배국가"(Th. Mayer)에 대한 반대로 "개인결합국가"의 원형으로 나타났다.
지배기초로서 봉건제에 전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국가라는 의미에서 순수한 봉건국가는 역사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고려되고 있
봉건하여 서울의 울타리로 삼았다. 라는 대목이 있다. 이러한 중국의 용례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와 대비하여 앞선 두 주의 통치방식이 지방분권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음을 나타낸 말한다. 그러나 봉건제란 말은 주로 유럽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유럽에서 봉건제나 봉건적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