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소련의 정책을 배경으로 공산당의 남북분립을 주도적으로 추진할 만한 인물을 등용했는데, 그것이 중국공산당 밑에 조선공작단을 만들어 귀국한 김일성 등의 빨치산 그룹이었다.
- 김일성은 평양의 소련군위사령부부사령 직함으로 북조선에 들어오게 됨.
체제가 당적 차원에서 확립되었다.
2.사회주의 분열과 주체노선의 천명
북한은 한국전쟁이후부터 1957년까지 새로운 환경에 대응해야 했고 서서히 모스크바의 획일적 지배로부터 이탈해 나가고 있었다. 김일성은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와 소련의 말렌코프식 경제정책을 추진
사회주의적 제도가 도입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북한에는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고 있었다. 한편, 미.소 공동체의 대립으로부터 이북의 소련측과 남쪽의 미국측이 협상을 시도했지만 계속 결렬되었고 결국 한반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졌다
권력엘리트의 특징은 김정일의 친인척이 권력 핵심부에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초기에 그의 권력을 친동생인 김영주에게 이양하려 했던 것이나 현재 김정일에 승계된 것 등이다. 또 정치국․비서국 등 권력서열 상위권인 20위권이내에는 약 25%정도가3) 친인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도자들은 전설적으로는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1945년 9월말까지 그들은 한국에 나타나지 않았다. 1945년 10월 중순 두 사람은 각각 미군정과 소련 군정에 의하여 동포들에게 거창하게 소개되었고, 1946년 2월 김일성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그리고 이승만은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