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여러분의 힘을 빌어 실행한지 무릇4회에 … 5천7백52명에 9만8천5백93명의 문맹을 타파하였다.(「동아일보」,1934년 9월 22일자 ‘문맹전선에서 전전삼월 삼천용사 당당개선’)
1930년대 가장 활발했던 야학운동으로 꼽히는 ‘브나로드운동’을 평가하는 데에는 크게 두가지 시각이 존재한다. 브나
맛보게 되었다.
국권을 상설하기 전, 나라가 품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교육입국의 정신을 내세우고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첫 번째는 민족지도자의 교육운동이었고, 두 번째는 기독교 선교사의 교육운동이었으며, 세 번째가 정부주도하에 전개된 교육운동이었다.
학생들이 여름 동안 가,갸와 1,2,3을 가르치는 것을 동아일보사에서는 브나로드운동이라 하였는데 이 명칭은 만일이라도 오해받기 쉽고 또 알아듣기에 불편이 있다고 하여 계몽운동이라고 개명을 하기로 하였다. (중략)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은 정치, 경제, 사상, 이 모든 방면의 이야기는 一言도 말아야
운동을 엄금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42년 국어사전의 초고가 거의 완결되었지만, 모두가 풍비박산이 되고 만다. (이 때 준비된 사전은 광복 이후인 1947년에야 비로소 ‘조선말 큰 사전’으로 완성되게 된다.)
또한 각 언론사의 주도로 한글 강습회가 개최되어 문자 보급 운동, 브나로드운동 등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