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는 공동체의 삶에 무관심을 초래함으로 양자 간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여기서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한 요소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개인주의가 탄생했다는 근대에는 오히려 역
근대화 이념’이 지금까지 자연과 전통을 “넘어서는”, 한국사회의 구세주와 같은 기획이기를 바랬다면, 그 지점에서 의문이 더욱 쌓이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지난 몇 년동안 “탈근대성”에 관한 담론들이 활발하게 발전되었고, 새천년을 앞둔 지금은 그에 대한 구체적 내용도 정리하지 않은
개인주의를 태동하게 하였다. 토지, 자본 등 생산수단을 근거로 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을 자본가와 노동자로 구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변화를 수반한 근대화 내지 산업사회화는 종래의 사회질서나 인간관계를 그 가치를 따져 볼 여유도 갖지 못한 채,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산업
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해외 진출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이를 조건으로 다른 열강들, 특히 영국과 관계를 원활히 하여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이 독일과 대립관계가 된 것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독일이
것을 모색했다. 즉 대공황의 해결책으로 등장한 부작용의 하나인 전체주의로 전 세계는 대전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 이전의 영 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유럽 주도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이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과 소련 주도 의 새로운 세계 질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