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구를 모시게 하여 당나라 황제에게 헌납하였더니, 당 태종이 이를 보고, "신라인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요, 사람의 기교(技巧)가 아니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한 전성기의 신라인들은, 왜 사원을 조성하면서 굳이 토산(土山)인 토함산에 인공으로 돌을 쌓아 석굴을 만드는 방법을 택한 것일까?
신라의 석탑이 정형화되는 초기의 석탑으로서 이후 전형적인 신라계 석탑의 시원형식(시작이 되는 처음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건축사 또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석가탑은 창 이후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큰 손상없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기단이나 탑신에 아무런
석굴암 창건 당시의 조각이 아닐 것으로 짐작하는 이유는 첫째, 팔부중상 신앙은 8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나는 것으로 석굴암이 조성된 연대와는 차이가 있고 둘째, 본존불이 있는 석굴암 후실의 조각에 비해 전체적으로 솜씨가 둔하고 움직임이 적다는 것이다.
그중 전실 쪽에서 본존불을 향해 오른쪽
석굴암이라 부르는 것은 일인들의 실수를 따르는 것으로, 부처가 있고 스님이 머무는 곳은 모두 절(寺)이라고 해야한다. 석불사는 일단 석굴법당(石窟法堂)에 본존불(本尊佛)이 있고 옛 기록- ꡐ삼국유사ꡑ, ꡐ산중일기(山中日記)<조선, 정시한(丁時翰)>ꡑ -에 보면 스님들이 거주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