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했으나 한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지다가, 일제 강점기 초에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석굴암 천장의 3분의 1이 무너져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부터 흙들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구멍을 그대로 놔둘 경우 본존불까지 파손될 위험이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아주
사천왕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주실 중앙의 본존불 앞뒤 두 곳에 방형의 석탑대석(石塔臺石) 위에는 작은 석탑을 배치한 흔적이 보인다. 두 석탑은 현재 석굴에 남아 있지 않으며 그 중 하나인 대리석 오층탑은 일본에 반출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이는 금당 앞에 쌍 탑을 배치하는 신라
석굴암에는 원래 전실이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 팔부중(남측)
전실은 금강역사(金剛力士)의 앞에 있는 네모난 방을 말하는데, 이 곳은 하늘 아래서 부터 지옥까지의 대표자들인 팔부신중이 새겨져 있다. 팔부신중은 석가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한다. 우선 남벽 서쪽
1. 석굴암의 창건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 (751년)에 국왕의 뜻을 받들어 김대성이 주관하여 조영하였다. 경덕왕은 신라 중대 최후의 임금으로, 번영한 때를 맞아 예술에 있어서도 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룩하였다. 그는 석굴암과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불국사의 석교, 황용사종, 석가여래상등 많은
신라의 석탑이 정형화되는 초기의 석탑으로서 이후 전형적인 신라계 석탑의 시원형식(시작이 되는 처음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건축사 또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석가탑은 창 이후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큰 손상없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기단이나 탑신에 아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