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하는 생산관계로 본 것이다. 17세기 후반이후 농노제 사회를 구축했던 양반-노비 신분제 사회가 해체되면서 소농이 자립적 생산단위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일정 수준의 시장 경제하에서 소 농사회의 성숙은 차후 일제시대 농민-노동자-자본가 계층으로 분화되면서 자본주의의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인의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하는 것 외에 철저한 과세대상지를 파악하여 지세를 더욱 많이 걷기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를 통해 거두어들인 지세는 조선의 경제발전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총독부의 식민지 수탈정책 비용으로 사용되어 조선경제의 생산적 발
소농사회론에 따르면 소농사회는 10세기 송대 이후 중국,14세기 이후 프랑스,17세기 이후 근세 일본 사회에 등장한 사회로, 한국에서는 17세기 후반 이래 농노제가 해체되는 반면 자립적 생산 단위로서의 소농이 성장하고, 소농의 촌락공동체, 관제, 사적 토지소유와 지주제, 그리고 일정수준의 시장경제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
‘영구병합’을 위한 근대 이식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 기본 목적 : ‘영구병합’
‘영구병합’이란?
조선을 영구히 일본의 영토로 삼겠다는 의미
조선의 사회, 경제, 정신, 문화를 일본과 같게 만들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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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조선민사령’ 이란 법 공포
식민지조선의 농가경제 상태에 대해서는 1925년 9월 내무국 사회과에서 발표한 「농가경제에 관한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주를 포함한 전체 농가 호수의 46.6%에 해당하는 1,271,236호가 수지 적자였으며 지주와 자작농은 토지소유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흑자를 나타낸 반면 소작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