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가 들어와서 더욱 확대되어 전대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시대를 출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당송변혁'을 거쳐 수립된 송대의 정치와 사회경제, 문화는 이후의 중국사회의 기본골격을 구성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의의가 있다. 송대는 정치, 사회경제, 사상과 문화전반에 걸쳐 변혁이 이루어졌
이것을 다시 계승하고자 하는 도통론의 면에서, 또 하나는 <성인은 배워서 이르러야 한다>고 하는 송학의 근본관념 아래 길의 파악을 목표로 학문의 목적과 그 절차가 명확하게 제시되었다는 점에서이다. 그것은 한당의 훈고학적 경학과는 달리, 경서를 통하여 통일적 사상을 배우고 그 참뜻을 체득
사상이었다. 또한 <천하>의 관념과 관련하여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민족(漢民族) 특유의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중화(中華, 華夏)라는 고도의 문화를 가진 한민족에 대하여 주변의 이민족을 이적(夷狄;오랑캐)이라 하며 문화수준이 낮은 야만인으로 간주하고, 이(夷)
주자는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추구하고 나아가 뿌리를 주돈이에게 두고 정이의 학설과 소옹, 장재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주자는 선대의 사상을 단순히 받아들인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종합하여 체계화시켰다. 여기에 송유의 주요과제였던 도교와 불교를 유가의 이론에 수요한 새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나 <무신봉사>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휘국공이 추증되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