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가 되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 서익(徐益)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첫 번째로 파직되었으나 그해 5월 다시 임명되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83년 7월 함경남도병사 이용의 막하 군관으로 전근, 10월 함경북도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오랑캐 토벌에
수군은 鹿島萬戶 鄭運 등 전사자 6명과 부상자 25명을 냈다.
(5) 명량해전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물러난 뒤 원균은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多大浦․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기
수군의 경우에는 각 도의 수군 최고 지휘관인 수군절도사에서 전임수사·겸수사로 이어지는 체계였다.
진관체제라는 하나의 군사체계를 전국적으로 확립했다고는 하나, 전국 모든 지역에 무장한 군인을 상주(常駐)시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장졸을 이끌고 동래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
I. 연구동향
1. 일제강점기 일본측의 연구성향
일제강점기 일제의 어용학자들에 의해 주도된 임진왜란사의 연구는 대부분 대체로 정치사와 관련된 것이거나 전투사에 치우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연구분야와 주제도 크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의 의도는 일본인의 우월성을 과장 선전하고 조선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