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이 일본을 단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회유와 교섭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기본적인 정책 기조는 임진왜란 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초 태종 때 웅천을 개항하였고, 세종 때 삼포를 개항하였지만 일본은 대마도를 중심
고려사에 왜구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10년인 1223년이다. 당시 고려는 몽골 침입으로 전쟁을 치르던 상황이었다. 이후 11차례나 고겨를 침입한 왜구는 고려가 원에 복속되고 1274년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서자 약 80년간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14세기 더 강력한 왜구가 등장하여
임진왜란 때 일시 폐쇄되었다가 임란 후 몇 차례 장소를 옮긴 후 1678년 초량왜관이 신축되었으며, 1872년 메이지[明治]정부에 의해 점령될 당시까지 양국의 외교 ·무역의 중심지로 존속되었다. 그리고 양국에서는 왜관에 관리를 파견하여 외교 및 무역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인터넷 자료 : 네이버
후소샤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자긍과잉과 성찰결여로 요약된다. 진정한 자긍은 과오에 대한 성찰이 동반할 때 가능한 것이다. ꡒ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ꡓ는 말이 있듯이, 자화자찬은 이웃의 존중과 인정을 얻어낼 수 없는 법이다. 성찰이 결여된 과거사 학습은 한 민족이나 국가의 미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