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사적인 신학적 틀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새로운 계시적 인식을 갖게 되었고 유대인들의 혈통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언약신학의 한계를 비평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포괄하는 범세계적인 믿음의 공동체, 아브라함의 참 후손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일어났도다. 또한 그가 수천 명의 사람들 가슴과 삶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 전체와 서방 세계에서도 자신의 영향력이 확장되고 효력이 입증되는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지켜보았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능력이나 기대를 훨씬 뛰어 넘어 미래의 모든 세대들이 기
하나님의 아들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음을 믿는 복음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롬 1:3-4, 16; 고전 15:1-8).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 사도들이 선포하는 그 복음만이, 우리의 신학과 역사적 예수연구의 시금석이다.
Ⅱ.
행동이었다. 이것은 헬레니즘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가난을 도와주면서 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공동체의 급속한 성장과 전진적인 계획의 결여로 인하여 공동체는 분배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숨어계신다고 한다. 이러한 신관에 근거하여 어떤 신학자는 ‘부정신학’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한 일 중에 첫 번째 일은 이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