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눈부신 공헌은 가톨릭적인 공로주의와 개신교적 신앙제일주의라는 태생적 양극성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제 3의 대안을 변증법적으로 제시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제 우리 웨슬리 후예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떤 편견 없이 웨슬리의 진면목
주의자 (Methodist)'라고 놀렸는데 후일에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 당년 31세의 웨슬리는 15년 동안 옥스포드 생활을 하여왔다.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좀 더 열성 있고 희생적인 활동을 하려는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그는 1735년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
복음에 대한 강조점과 해석의 다양성을 전제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주요 교리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18세기 영국의 존웨슬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메소디스트 운동은 미국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쳐 미국 감리교회를 형성하였고, 대교단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웨슬리가 신학과 목회현장의 양극을 특유의 실천 신학으로 통전시켰다고 본다. 아우틀러가 지적한 것처럼 웨슬리는 루터나 할레(Halle)의 경건주의 자들과 같이 대학과 같은 어떤 학문적 기반도 갖지 못했고, 칼뱅이나 낙스와같이 어떤 정치적 기반도 없었으며, 새로운 교파를 창립할 의도도 없었기 때
주의” 그리고 “세속화 시대”가 근대의 특징이지만 이것은 교회 밖에서 본 시대적 특징이지 교회의 내면적인 삶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세속화를 촉진시킨 많은 요인 중에서 불란서 혁명과 자유주의 운동의 발흥은 근대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2. 근대 교회사 출발과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