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합리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집단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개별적인 합리성을 말한다. 이는 개체의 주관성을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의 주체개념은 하버마스의 전체적 주체와는 대조적으로 개별적이다. 이 개별적 주체를 억압적인 사회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모더니즘과 논쟁하고 있는
릴케나 아도르노와 비슷하게 우리의 것들 속에서도 얼마씩 엿보이고 있다. 특정한 한 시대의 특징을 가장 압축적이면서도 분명하게 반영해주는 한 수단으로서의 문학의 한 역할을 감안해 볼 때, 이러한 한 시대의 특징과 그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 시대의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는 충분히 우
릴케나 아도르노와 비슷하게 우리의 것들 속에서도 얼마씩 엿보이고 있다. 삭막한 도시 풍경에 대한 환멸과 그에 이은 자연에의 회기 혹은 동화의 강한 의지를 우리는 쉽게 엿볼 수 있다. 이밖에도 정현종 등의 시작들로부터도 우리는 이러한 자연에의 미메시스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우리
철학적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술의 자율성이 갖는 변증법적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아도르노는 화해되지 못한 삶과 화해에 대한 계몽유토피아적 이념을 서로 매개하는 예술의 기능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도르노는 현실에 대한 예술의 관계를 죽은 것에의 미메시스와 합리적 구성이라는 이중적 측
미메시스'이론에 의해 더욱 풍부화 된다. 미메시스는 독일어로 'Nachahmen'․'nachbilden', 한국어로 모방, 흉내, 라틴어로 'imitatio' 등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이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원래의 그 의미가 변용되고 제한되어 사용된 결과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철학․예술학․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