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고구려와 백제의 교육
1. 고구려의 교육
(1) 고구려의 고육
- 고구려는 국초부터 문자를 사용하여 『유기』라는 100권의 역사책을 편찬했던 나라로, 일찍이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국가의 체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고구려는 통치이념으로 충 · 효를 기반으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주도 일본인과 한 무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조선의 군중』1925).
생각하는 바를 써내려간 수필형태의 글로 연암 박지원의 여행 중에 쓰인 작품들 중에서 비교적 안정된 장소에서 지어진 작품이다. 『열하일기』의 <동란섭필>은 ‘동란재’라는 장소에서 생각을 적어 내려간 글로 순서와 논리에 따라 서술하지 않은 무형식의 글이다. 연암 박지원이 수필과 같은 신변
저자자신의 시대의 도덕과 윤리에 어긋날 경우 그 잘못을 밝혀 후인들에게 교훈이 되게 해야 하며, 역대의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세 고열의 자료가 되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그의 역사서술에 있어서의 의의는 동사강목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안정복이 생각하는 역사서술의 대상은 정
양명학 연구에 몰두하여 강화학파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어쨌든 학문 발전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양명학의 저조한 발전은 분명 조선학술계에 있어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맺음말
지금까지 주자학과 양명학에 대해 비교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