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조사실을 중심으로 동양사 연구가 진행되었다. 여기서는 겉으로는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 지리조사를 임무로 삼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식민정책의 토대를 다지려는 것이었다. 여기서 만선사관이라는 역사관이 만들어졌다. 일선동조론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일본 안에서 근대 사학이 발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민족 독립의 강력한 이념적 기반을 구축하고자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통치로 인해 조선 내에서는 불가능했고 결국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여 민족사학(民族史學)의 길을 열어나간다. 당시의 많은 역사가들은 우리 민족의 이념적 독립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
때, 무려 연인원 1만 5천만 명을 동원하였으며, 부설과정에서 공사 혹은 운행을 훼방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매우 강력하게 처벌하였다. 세 번째, 철도를 통해 일본은 조선 각지와 만주에 상품을 판매하였으며, 식량 혹은 자원을 약탈하는 도구였다. 그래서 각 종단역이 항구나 국경도시가 대부분이었다.
만주족은 시대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 한나라 때는 읍루, 남북조시대 때는 물길, 수`당나라 때는 말갈, 송~명나라 때는 여진, 청나라 때 만주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만주역사는 단군 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 청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만주역사와 우리 민족은 아주
만주에서 전개된 역사들을 중국 역사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계획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샀다. 중국이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공공연하게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지방정부’라는 언급을 하는데다가 외교부 홈페이지의 한국 관련 정보를 왜곡, 삭제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우리역사를 빼앗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