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게 되었으며, 특히 홍문관교리인 이양천에게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적등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는 등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다.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더불어 평생의 문우로 지냄과 아울러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1755년 19세에 이르러 문단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스승 이
진다. 이전까지 다산의 문학론에 대해서는 실학이 성리학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여 실학을 성리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려하거나 혹은 性理學 대 實學이라는 도식적인 兩分法을 전제로 한 관점으로 인해 쉬이 평가되어왔다. 따라서 오히려 그의 실학관과 문학관을 왜곡시키거나 정약용의 문
조선시대에 양산된 것이다. 조선후기에 한문학이 시대적 흐름에 맞춰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는 데 실학의 거목인 박지원에 의해 새로운 차원의 한문학이 〈허생전 허생전〉·〈양반전 량반전>을 지어 양반의 위선을 지적하는 세태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해 내고 있다. 이 장
진행방향은 국문사용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병혁, 위의 책, 368면.)
4. 비평문학의 전개
‘무엇이 문학이며 왜 그 것은 필요한가’라던가, 그 필요에 값하기 위해‘창작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문학행위의 출발이자 귀착점이기도 하다. 이론바
진 성향으로 인해 정조는 소품문이 유가 사상을 오염시키고 반 유가 사상을 전파할 위험성이 있다는 판단 하에 결국 전통 고문을 어지럽힌 다는 이유로 ‘문체반정’을 감행했다. 소품문을 창작하던 백탑파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정조가 출제한 과거 시험에 소품체 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