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 문인이라는 이유로 장형(杖刑)을 당하고 평안북도 희천으로 유배된다. 다시 47세에 전라남도 순천시로 유배지를 옮긴다. 이 시기에 평안도 희천에서 정암 조광조에게 도학을 가르쳐서, 조선에서 도학의 정통을 이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후에 51세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사림파는 경상도 밀양 출신인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일파이다. 사림파의 중심인물인 김종직은 동방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대학자로서 그의 제자 중에는 김굉필·정여창·조위,김일손,유호인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세조의 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에서는 절의파와 일맥상통하지만 적당한 기회를
사림파들의 스승으로 지목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빌미로 그 문인들인 사림파 40여명을 숙청하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연달아 일으키게 된다. 바로 이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대표적인 학자가 한훤당 김굉필이다.
김굉필은 본관이 황해도 서흥이며 단종 2년(1454년) 서울의 정릉(지금의 정동)에
김일손을 추천했으나, 이극돈은 그가 홍문관으로 들어가야 할 사람이라면서 후보자 명단에 넣는 것을 반대했다. 김인숙(2009), 『조선 4대 사화』, 느낌이 있는 책, 17쪽
여기에 김일손은 그에게 좋은 마음만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일손은 이극돈이 정희왕후가 상을 당했을 때에도 기생을
사화’가 발생하였고,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 이때부터 훈구 정치 시대의 말기적 현상인 외척 권신정치시대 공신 세력이 늙어 죽고 사림파의 과도한 개혁 주장에 염증을 느낀 왕이 등을 돌림으로써 정권은 외척 권신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김안로․윤임․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