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구하는 조서를 통해 공녀요구가 본격화 되었다. 이에 따라 공녀의 헌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서 원나라 세력이 물러가는 공민왕 초기까지 80년간 거의 매년 고려의 처녀들이 원나라 땅으로 끌려가야만 하였다.
공녀제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원나라의 대 고려 정책을 파악할 필요가
공녀를 명나라 황실의 궁녀로 보냈고 이때부터 조선시대까지 명에 대한 공녀가 계속되었다. 명나라 태조(太祖)는 조선 여자 한비(韓妃)를 맞아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고 또 석비(碩妃)도 조선여자로서 영락제(永樂帝)를 낳았다. 명나라는 1405년(태종 8)부터 1521년(중종 16)까지 10여 차례 공녀를 요구하
공녀는 중세시대의 또 다른 어두운 역사의 흔적이다. 위안부 사냥꾼들에게 식민지시기의 여인들이 잡혀갔다면, 고려?조선
시대의 여인들도 공녀사냥꾼들의 마수에 걸려들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수천명의 어리고 아리따운 처녀들이 원?명?청나라 땅으로 끌려갔다. 낯설고 물설은 타국으로 끌려가지 않
하고 그 자식에게는 관리등용금지령을 내렸지만 제대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18대 의종 원년(1147)에 재차 소공 이상의 근친과의 혼인을 금지하였다. 왕실과 양반 간의 동성혼을 국법으로 최초로 제정한 사람은 26대 충선왕(1309년) 때이며 이는 원의 세조가 왕가의 동성혼에 대해 비판을 가했기 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는 생활사 중심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나 역사 서에서 보는 정사부분에서 보아 온 부분이 아닌 민중들의 삶 하나하나가 드러나고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이책이 민중들의 삶을 세세히 그려내고 있고, 옴니버스 식의 분절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