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가 당나라에 유학하고자 했던 이유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장 삼장을 흠모하여 당시 유행하던 신유식학의 습득에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마음먹기 이전에 이미 유식학을 접했으나 신라 사회에 이미 퍼져 있던 기존의 구유식학 체계로는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선과 악이 공(空)함을 모르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몸과 마음을 억제하면서 이것이 마음 닦는 것이다 한다. 이는 크게
미혹된 것이다. … (중략) … 일어남이 곧 일어남이 아니라 그 순간에 단박 고요
해지니 어찌 다시 그것들을 끊을 필요가 있겠는가? 고로 이르기
사상의 지양․종합이라고 판석하고 있다. 즉, <<기신론>>은 마음의 청정한 면만을 주로 찬탄하고 강조해 온 중관사상과 마음의 染沔한 면을 주로 밝혀 온 유식사상이 잘 조화를 이루어 眞俗不二의 불타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본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해석은 <<기신론>> 출현의 시기에 인도 불교사상
불교내의 다양한 이론과 종파의 묘한 종합, 셋째, 선과 교의 원융한 아우름이다. 이 원융회통의 윤리는 고구려의 승랑에 의해 중국에서 그 곳 학인을 깨우쳐 중국불교를 화합시켰고 신라의 원측에 의해 서로 다른 유식의 학설을 종합하는 폭넓은 노력을 보였으며 신라의 원효에 와서 초석을 굳게 다지
불교는 왕과 귀족들의 종교였으며, 승려들은 산속에 들어가 참선을 하여, 일반 백성들이 불교를 접하기는 힘들었고 교리도 너무 어려웠다.
※ 원효대사의 사상
1.일심사상 : 원효의 일심사상은 인간의 심식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