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지어,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 철학을 확립하였다. 그의 사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리 철학은 대체로 향촌에서 중소 지주적 경제 기반을 가진, 생활이 비교적 안정된 사림들이 발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9년)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이황과 이이의 성리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그들의 우주론과 인성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그들의 수양론을 비교 서술하고 있다. 그 두 성리학자의 우주론, 인성론, 수양론은 지금까지 학계에서 많이 연구되어져 사실상 진부한 감마저 드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동양철학산책3공통) 1.
이황
①주리론적 견해에서 성리학 이론을 체계 발전을 가져오다.(형이상학, 도덕규범, 정신세계 강조)
→ 교육철학에서는 계명(신념을 고취하는 교육)으로서의 교육과 같다.
②향약을 조선의 실정에 알맞게 적절히 편성 조직하다.
③도산서원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치중하다.
④군주훈계교육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