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고대 시대, 이를테면 나라 시대나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임나와 일본 관계를 전해주는 역사책이 거의 없었다. 임나에 관한 구체적인 기사는 <일본서기>에 집중되어 있다.
<백제본기>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은 6세기 중엽에 백제 또는 가야 지방에서 사용된 명칭으로 볼 수 없다.”
가야 제국을 기술 노예로 삼아 철기 문화를 도입하여 통일의 전열을 가다듬었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변설과 함께 몇 가지 왜곡된 사료들을 편취, 때로는 조작하는 범죄적 무리를 가해 가면서까지 입증해 보이려했던 한반도에서의 임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임나에 대한 <일본서기>를
임나는 광개토왕비, 삼국사기의 강수전, 진경대사탑비, 한원, 통전(通典)등 한국과 중국의 문헌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가야지역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이란 국호는 7세기 이후에나 확인되는 것으로 임나일본부의 문제가 거론되는 6세기 중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서기] 편찬시에 왜(
가야 지배층의 유일한 고분군이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았었다. 당시만 해도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만한 유물이 거의 없었는데, 복천동 고분군에서 1차 발굴 때부터 쏟아져 나온 철제 갑쥬류.토기류.장신구 등 다양한 유물들은 일본 것보다 시기가 빠르고 뛰어나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할 수 있
일본인의 우월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새 교과서는 고대사에 있어서 조선남부에 일본세력이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임나일본부 설을 서술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한반도는 중국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반해 일본은 독립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근현대사 서술에 있어서도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