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 사람들이 갖게 된 명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비교하고, 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게 된 배경에 대해 정리해 보시오.
1) 명에 대한 인식
명에 대한 인식은 좋고 나쁨, 2가지로 나뉜다. 명에 대한 인식이 나쁜 사람들은 임진왜란 초기 제대로 통제되지 못하던 명군에게 방화,
임진왜란하면 떠오르는 것에는 대부분 공통적으로 거북선, 이순신, 김명민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 이순식역으로 출연), 7년 전쟁 등을 꼽았고, 병자호란하면 떠오르는 것으로 청나라, 친명정책, 인조, 효종, 홍타이치, 남한산성, 후금, 강화도 등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두 난에 대
임진왜란후 두모포 왜관으로 다시 1678년 초량왜관으로 변화한 것은 모두 조선이 허가해 준 것인데 이를 ‘소씨왜관’이라 하여 대마도주의 사적왜관으로 기술함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등한 관계를 맺고”라는 부분은 일본과 조선의 대등한 관계가 계속 지속된 것이 아님을 은근히 암시하는 대
히로시의 연구는 일본측 임진왜란사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통사연구인, 그의 연구가 있은후, 비로소 본격적인 저술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관학자들의 연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사를 일본제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 왜곡 서술하였다는 인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선은 국민에게 많은 적대감을 안겨 준 대상과 무역을 다시 재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 일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통신사의 왕래에 따른 근 200년 간 일본과 한국은 이 지역의 평화와 선린관계를 지속했으며, 동시에 여태까지 보아온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