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악원 첨정으로 임명된 이래 제조로서 이의 편찬 작업을 마무리하기까지, 전후 20여년 동안이나 장악원 겸관으로 있었다. 따라서 지위와 경험, 이론과 실제 등 모든 면에서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음악적 자질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그인 만큼, 『악학궤범』의 편찬이 전적으로 그의 주관 아래 이
들어가면서...
이성계와 급진파 사대부들은 조선을 개창한 후 정치, 윤리 철학으로 성리학을 채택하여 이에 입각한 새 사회, 문화, 정치제도를 만들었다.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논리에 따라 여성은 가내의 사람으로만 인식되었고 사회적인 모든 활동이 제한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여성사는 축소
장악원 소속의 여기와 악공’이란 말에서 보듯이 여악은 관습도감과 장악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관습도감은 건국 초에 설립된 음악기관이고, 장악원은 건국초의 아악서(雅樂署)․전악서(典樂署)․봉상시(奉常寺)․악학(樂學)․관습도감(慣習都監)이 하던 업무를 총괄하여 담당하던 음악기
지방의 감영, 군영, 수영도 음악의 큰 수요자였다. 이곳에서도 장악원과 오위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자체 공급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 여기에 속한 악사와 기생은 궁중의 행사에 불려가기도 했다. 서울과 지방관아 사이에 인적․ 물적 자원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지방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