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서울시내에 진입하였고 그날 오후 5시 북한군은 서울을 완전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국전쟁사』 1권, 개정판, 국방부, 1977, 541쪽.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그날 바로 전권대표들을 파견하여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전시행정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김일성, 『김일성전집
수정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라고 비난함으로써 중소분쟁(中蘇紛爭)이 시작되었다. 북한은 내심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소련의 경제지원이 필요했기에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중소분쟁이 격화되면서 북한은 점차 중국을 편들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 만주에 까지 전쟁이 확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이 한국전에서 패배할 경우 중국과 자본주의 국가간의 완충지대 사라지게 되는 것이기에 중국은 북한에 직접 원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한국전 이전 북한과 소련과의
주의자들도 이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은 만주 전역에서 전개되었으며,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인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해 투쟁하였다.
교류&항일투쟁 : 동만의 유격부대들은 산하에 3개 사를 둔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다. 이 개편에서 김일성은
형성되게 되었고 미국은 국제경찰국을 자임하면서 전 세계의 안보를 관할하려 하고 있으며 중국과 북한도 미국의 간섭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하여 중국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경계하고 있으며 북한과의 연대를 통해 이에 대처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다음의 사건들을 통하여 이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