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게 되었으며, 특히 홍문관교리인 이양천에게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적등을 교훈받아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는 등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다. 처남 이재성(李在誠)과 더불어 평생의 문우로 지냄과 아울러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1755년 19세에 이르러 문단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스승 이
조선시대에 양산된 것이다. 조선후기에 한문학이 시대적 흐름에 맞춰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 시작하는 데 실학의 거목인 박지원에 의해 새로운 차원의 한문학이 〈허생전〉·〈양반전>을 지어 양반의 위선을 지적하는 세태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해 내고 있다. 이 장에서는 임진왜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그의 학문과 사상은 실학자로서 특징이 지어진다. 이전까지 다산의 문학론에 대해서는 실학이 성리학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여 실학을 성리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려하거나 혹은 性理學 대 實學이라는 도식적인 兩分法을 전제로 한 관점으로 인해 쉬이 평가되
문학론으로 정착되니까 지는 精深한 사려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서도 書經으로부터 魏文帝의 단편적인 언급(典論)을 거쳐,梁의 유협(文心調龍)과 周榮(詩品)에게서 초기 비평형태를 접하게 되었다가, 宋代 歐陽脩의 六一詩話 이후로 비평문학의 울흥을 보게 된다. 우리의 역시 고전
진 성향으로 인해 정조는 소품문이 유가 사상을 오염시키고 반 유가 사상을 전파할 위험성이 있다는 판단 하에 결국 전통 고문을 어지럽힌 다는 이유로 ‘문체반정’을 감행했다. 소품문을 창작하던 백탑파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고 정조가 출제한 과거 시험에 소품체 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