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존재
문자로 기록할 수 있는 권력집단의 기억(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수 많은 기억 속에서도 전쟁의 기억 ★
전쟁의 기억: 공식적 기억에 의한 단편적 기억의 승계→ 강화.
문제 : 기억의 충돌/ 기억의 전쟁
그 가운데 선 한국전쟁_남한과 미국의 기억
남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전혀 유용성이 없는 전법이었다.
국방태세에 대해서 알아보면, 당시의 국방책임자들은 일본의 침략을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전에서 미리 적의 상륙을 저지하겠다는 기본적인 계책조차 갖지 못한 실정에 놓여 있었다. 조선수군의 존재이유는 일본의 침략으로
한국으로부터의 문물 전수가 아닌 인적 교류 차원으로 보려는 일본측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
-통신사는 에도시대 12회 방일하였다. 통신사와의 교류는 막부이외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통신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교류를 구하였다-오사카
-통신사 숙소에는 일본 지식인이 방문하여 교
주변국에 대한 가해 사실은 가감없이 교과서에 반영된다.
그러나 1982년에 문부성은 직접 검정대상인 교과서에 ‘침략’을 ‘진출’로 기술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밝혀져 한국, 중국 등 주변국들과 일본 내 양심세력의 거센 반발을 초래한 ‘교과서 파동’을 야기하였다. 이때부터 교과서 건에 관한 한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요된 ‘한일합방조약’, 이로서 우리민족은 국가 없는 민족이 되었다. 이때부터 한민족은 35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도 큰 아픔이 된다. 따라서 식민지시대가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