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라 부르고, 사서야말로 공문의 사제전수에 도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주자가 여기에 베푼 주석 가운데 ‘대학장구’, ‘논어집주’, ‘맹자집주’, ‘중용장구’는 그의 다른 여러 주석과 함께 신주로 불리며, 한 ·당의 고주에 비해 새로운 학문의 전개
논어·맹자’ 등은 차기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 강론에서 존덕성에 대해 도학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 《시집전》 등이 있
논어·맹자’ 등은 차기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 강론에서 존덕성에 대해 도학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 《시집전》 등이 있
집주》로, 사망 직전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 주희가 《대학》 《중용》을 《논어》 《맹자》와 함께 <사서>라 하여 오경(五經)의 입문서라는 위치를 부여한 것은 사상적으로 유기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즉, 하나는 유교의 길(道)의 정통적 전통을 인정하여 이것을 다시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