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산수화에는 `한`의 사상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진리관이 깃들어 있다. 고래로 한인들은 사물의 진리를 판단함에 있어 그 근본 중심을 부이성에 둔다. 이것은 한국인의 대물관에서 오는 시방식의 특성이다. 우리가 보는 산수는 주관 쪽에서 객관적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연의 일
산수화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중국 화론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의 화단에서도 자연히 그 영향을 받게 되어 겸재정선의 화풍에 영향을 미친 것을 볼 수 있다. 표암 강희안은 겸재정선의 작품을 보고 동국 진경의 표현을 써서 진경산수의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그는 그의 작품을 보고 동국이라는 말을
진경산수화풍
대체로 17, 18세기에 등장한 실학사상과 때를 같이하여 나타난 경향으로 재래의 화보를 본받아 그리던 산수에서 벗어나 직접 사생을 통하여 실경을 그린 실경산수의 일종이다. 진경산수화풍은 종래에 중국화가들이 그린 작품을 무조건 베낀다거나 관념적으로 산수를 그리던 풍조에 대한
Ⅰ. 개요
화서는 회화를 맡아보는 정부소관의 일기관으로서 태조 원년(任申)에 창설된 것인데, 처음에는 도화원(圖畵院)이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서(署)로 고쳤다. 도화서의 시험제를 보면, 인재 선발 시에 여러 학생에 대해서, 네 계절의 첫 달에 본조에서 제조와 함께 인재를 선발하는데, 제조가 없는
화풍을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였다. 중기부터는 남종화풍이 계속적으로 도입되는데 이정근의 <<미법산수도>> 등에서 그 모습이 나타난다. 후기에 들어서 조선성리학이 확립되면서 조선 고유의 색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이때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조선화풍인 진경산수화풍을 확립한 겸재정선을 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