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이라는 단어와 함께 지탄의 대상이 된다.
대통령에서부터 10대 청소년들까지, 우리 국민 대다수가 지니고 있는 친일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우리조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과연 친일파는 무조건 우리 모두의 적인가, 또한 그들은 정말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 하나
민족이라는 관념을 전제로 하여 자신이 하려는 행위가 민족의 이익에 반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다른 목적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위 하였을 때 인정될 수 있다. 그런데 민족이라는 개념은 근대화를 통해 자유주의와 평등주의가 확산되면서 나타났다. 당시 근대화의 여명기였던 식민지 시대에는 이러
친일파를 어떻게 재판할 것이냐며 친일파 청산은 불가능하며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친일문제가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현재의 문제이며 앞으로도 영향을 미칠 미래의 문제이기에 친일문제에 대한 매듭이 올바르게 지어져야 하며 그릇된 역사관을 바로 잡아야 한다.
식민지 통치 강도를 더해가자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도 독립에 항상 회의를 품고 일제의 압력이 거세질수록 더욱 회의하여 급기야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의 독립은 불능하다고 판단하고 변절한 자들이다. 대표적인 이는 서춘, 박희도, 양주삼, 유진오 등이다. 이 당시 민족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친일
대한제국을 둘러싸고 큰 이익갈등을 하고 있었다. 러 ․ 일 모두 제각기 방법을 가지고 한반도를 포섭하려 하였고, 대한제국 내에서도 친러파와 친일파, 그리고 중립파로 나뉘어 각기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권이 유린되고 국토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최우선 과제는 열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