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삼국통일 견해가 양립한다. 그러나 신라와 같이 전쟁을 수행한 당은 국내 학계의 논의에서 제외되는 경향이 있다. 자국 중심의 해석은 중국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백제·고구려의 멸망은 당이 주도했으며, 신라는 부수적인 존재라는 가벼운 인식이다. 이기천, 「당의 입
당의 연합에 의한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8년의 고구려 멸망, 676년 당 세력의 축출과 698년 고구려 고지에서 발해의 건국 등 일련의 연대기적 사실이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후대의 역사인식은 ‘신라의 삼국통일’ 또는 ‘신라의 반도통일과 발해의 건국’등으로 정리되고 있다. 이번 발표에서
백제를 먼저 공격하여,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시켰고(660), 이어서 지배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있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을 함락하였다.(668)
삼국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 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
백제(900), 궁예의 후고구려(901)가 건국됨에 따라 후삼국시기에 돌입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의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멸망
2. 통일신라 시대의 통치체제와 생활상
통일신라시대의 관부는 구조상 당의 6전 조직을 모방하였으나, 신라의 실정에 맞게 운영
ex ) 집사부
경
고구려는 427년 평양천도 이후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어서 서변의 안정이 시급한 문제였기에 남조 송이나 유연과 연결하여 북위를 견제하면서 직접적으로 북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466년에 북위의 청혼을 고구려가 거절하고 472년에 고구려의 남진에 위협을 느낀 백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