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 <도산십이곡>
(1) 퇴계이황의 생애
퇴계이황(退溪李滉 1501(연산군 7년)~1570년(선조 3))은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경상북도 예안에서 진사 식埴의 아들로 태어났다. 퇴계의 생애는 태어나서 33세까지의 성장기, 34세부터 49세까지의 사환기仕宦期(관직에 있던 시기), 50세부터 70
이황,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하여, 산림유(山林儒)의 표상이 되어 온 남명 조식, 시대를 개혁하고자 했던 정암 조광조, 목민관의 임무를 강조한 다산 정약용 등의 지고한 선비정신은 우리의 전통적인 인간관으로 한국 사상과 철학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였다.
(1) 退溪李滉퇴계이황은 동방의 주
이황과 정지운의 『천명도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됨.
『입학도설(入學圖說)』의 서문
금마군(金馬郡)에 귀양 와 있자니 나에게 『대학』과 『중용』을 배우는 초학자들이 한 둘이 있었는데, 거듭 자세히 설명해 주어도 분명히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에 주염계
1. 서론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 정치가, 문인, 교육자로 불린다. 때문에 퇴계와 관련하여 저술된 논저는 확인된 논문만 해도 천여 편에 이르고, 단행본도 수 십 권에 달할 정도로 양과 질에 있어서 다른 어떤 인물보다 많이 연구되었다. 또한 퇴계가 이룬 뛰어난 업적은
.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