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세 대사성 직을 사퇴한 뒤로 무려 20차례나 사퇴와 임명으로 점철되었는데,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 50세부터 70세까지의 강학기에는 탁월한 학문적 성취와 제자양성이라는 두가지 업적을 이루어 냈다. 고향에 한서암을 짓고 가르치던 그는 60세가 되는 해 도산 남쪽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其三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봐도 녀던 길 알페 잇네
녀던 길 알페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고인이 성현을 지칭한다는 것은 우리들 모두 잘 안다. 그러므로 배운다는 것은 성현이 가던 길을 그대로 본받아 따르는 것이다. 진리는 내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발견
… 한림별곡류(翰林別曲類)는 문인의 입에서 나왔으나 교만하고 방탕하며 아울러 비루하게 희롱하고 친압(親狎)하여, 더욱 군자가 숭상할 바는 아니다. 오직 근세에는 이별(李鼈)의 <육가>(六歌)가 세상에 유행하는데, 그것이 이것(한림별곡류)보다 더 좋다고는 하나, 세상을 희롱하고 불공(不恭)한 뜻이
㉣ 방황과 홀로서기
율곡은 나이 열 셋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때부터 문장이 날로 성취되어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그런 명성과 기대 못지않게 그의 학문과 현실 사이에서의 고민과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자신을 알아준 문장가 송인(宋寅)에게 보낸 다음 글은 그의 이러한 갈등을 단적으
도산십이곡>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산십이곡>은 그의 시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비록 한자어가 많이 생경한 감을 주지만, 이황이 고도의 한학자이면서도 한글을 통한 쉬운 어법을 구사하여 특출한 언어미를 보여 주었다는 데 문학사적 의의를 더해준다.
2. 율곡 이이와 <고산구곡가(高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