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대는 조선총독부의 교육, 문화정책은 무론 식민지통치정책 전반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설치. 운영되었다. 이곳에서 배출된 2,300여명의 일본인 및한국인 고급인력들은 대부분 한반도는 물론 일본이나 만주 등 각지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지배 엘리트로 편입되어 활동하였고 일제의 패망 이후에
교육
(2) 교육제도 측면에서의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교육에 관한 시기구분
① 1910년대의 분리와 차별을 기본적 성격으로 하는 교육
② 1920년대 이후의 통합과 차별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
나. 조선교육령 : 1911년 8월 공포
-> 한국병합 후 최초의 10년간에 있어서 조선의 교육체제의 형식을 갖춤.
상의 효율적인 배제의 필요와 ③동아시아 지역연구의 필요를 이유로, 일본 본국에 버금가는 고등교육기관을 조선에 확충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1920년 1월 하순 일본 본국에서도 도쿄제국대학 명예학장과 교수 수 십 명이 [만선문화의 연구를 도모하기 위해서], 서울과 중국의 대련또는 여순에 대학을
대학’ 모형의 도입배경
(1) 제국대학 모형의 도입
경성제국대학은 본국의 대학 법령에 의해 설립되고 제도와 시설, 학과목이나 학문적 수준 등이 본국의 제국대학과 같은 것이었다. 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에 제국대학을 설립한 이유는 ‘일시동인’ 이념에 따른 내지준거주의였다.
그러나 일제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사의 주체성이나 독자성, 내재적 발전성은 모두 무시당했고, 나아가 한국사의 존립 그 자체까지도 부정당했다. 일제는 제국주의에 논리에 입각해 우리의 역사와 사회를 해석했고, 그를 통해 우리나라의 민족의식을 말살시키고 더 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