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으로서 도량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며, “깊숙히 팔짱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세”만을 계속하여 국가적 위기 상황을 바르게 인식조차도 하지 못한 임금이었다. 항상 선조 주변에는 아첨하는 무리들이 모여들어 지도층의 분열을 심화 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일한 존재이며 이러한 행동의 근원은 신(信)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연암은 평민과의 호흡을 통하여 평민에게도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의 진실이 공유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농, 공, 상에게 공헌하려는 실학사상도 이러한 자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현실의 사대부들에게 느낄 수 없었던 평민의 인간
교조주의가 고개 들었고, 정치에서는 당론이 심화되었고, 사회에서는 사회혼란과 민생고가 매우 극심해졌고, 신분제도에서는 서얼금고가 더욱 더 가혹해졌다. 허균은 이런 모순의 시대에 살면서 개혁의 의지를 굳혔고, 개혁사상을 말했으며, 때로는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몫을 맡기도 하였다.
살았던 조선의 학자로서, 흔히 실학의 선구자(先驅者)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3~4줄로서 짧게 요약될 수 있을 만큼 한백겸의 학문적 체계나 사상이 좁지만은 않다. 여기에서는 그의 생애와, 저서인 『구암집』·『동국지리지』를 통해, 그의 학문적 체계와 실학의 특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정함으로써 신의 관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것은 타일러의 학설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한 원시인에게서 꿈이 그처럼 중대한 경험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두고 논란도 있었으나, 이원론(二元論)의 사고양식을 설명하는 양식으로서 아직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