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僧侶 一然이 불교적 눈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견 너무도 타당한 일이었다고 보인다. 다만『三國遺事』에 실려있는 14수의 현존 향가가 애초에 어떠한 성격의 노래였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배경설화에 대한 고찰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그리고
사뇌가는 신라가요 향가에서 주로 논의하고 시조와 가사는 조선시대의 노래로 간주되어지기 때문에 고려가요의 범주로 넣기에 모호한 면이 있다.
고려가요를 좁은 뜻으로는 속요만을 말한다. 민요에 기반을 두고 있어 소박하고 곡진한 감정을 담고 있는 서정적 성격의 속요와 신흥대사부들의 새로운
향가의개념 규정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과제가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三代目』의성격을 파악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향가에 대한 기록 중에서 『三代目』은 향가를 가장 집대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향가집『三代目』에 대한 語意를 ‘사뇌가
의 기사대조 방식을 좇아 성덕왕 때의 동방진무(東方鎭撫)사실을 순정공 부임의 직무로 보고, 순정공은 관권의 대리자로, 수로부인은 무당으로, 노인은 신격으로 설정하여 신라지배층의 민심수습책으로 행했을 굿과 관련지어 <해가>와 <헌화가>를 동일한 논리로 해석한 바 있다.
황패강은 최근 향가
의 형식적 전통을 수용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종결의 기능을 지닌 낙구의 형식적 전통은 멀리 사뇌가계 향가로부터 속요를 거쳐 시조로 이어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山河千里國(산하천리국)에 / 佳氣鬱蔥蔥(가기울홀홀)샷다
金殿九重(금전구중)에 / 明日月(명일월)시니
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