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이 살던 16세기 말은 정신에서는 유교의 교조주의가 고개 들었고, 정치에서는 당론이 심화되었고, 사회에서는 사회혼란과 민생고가 매우 극심해졌고, 신분제도에서는 서얼금고가 더욱 더 가혹해졌다. 허균은 이런 모순의 시대에 살면서 개혁의 의지를 굳혔고, 개혁사상을 말했으며, 때로는 권력의
Ⅰ. 개요
홍길동전 작품의 창작 시기는 17세기로 추정된다. 아마도 선조 40년부터 광해 5년 4월 사이에 제작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것은 허균이 선조말 사회의 혼란을 틈타고 일어난 7인 서류 사건이 <홍길동전>과 내용이 유사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창작의 동기는 7인
사상은 「홍길동전」을 비롯한 다른 소설로 형상화되기도 하고 사회활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논설 유재론(遺才論)을 통하여 표현되기도 하였다.
둘째, 허균은 또한 민본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위정자의 횡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애민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논설 호민론(
허균의 자는 단보, 호는 교산 또는 성소이며 별호는 일월거사이다. 그는 1569년 서울의 이름난 양반문인가정에서 태어났다.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윈 후 편모슬하에서 자라났으며 서자출신의 진보적 시인 이달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시문을 배우면서 그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호탕하고도 다
교산의 유고이다. 부부·문부의 6권 외에 또 시부가 있어 모두 8권인데 전질을 손수 썼다.〈갑진명주고 甲辰溟州藁〉〈서관행록 西關行錄〉〈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제2권은 옥사가 일어나자 마침내 모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이것을 정리하여 우리 집에 보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