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왕가의 계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왕대실록」이니 「원록(源錄)」이니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각 씨족의 족보가 발달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에 대하여는 이를 명백하게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국의 한나라 시대부터 이것이
벗어나 보기 위해서 두 차례나 만주로 탈출하려다가 굴욕적인 실패를 맛보고 말았던 것이다. (중략) 거기에다가 ‘나는 조국 광복에 헌신하고 있는 독립투사의 아들’이라는 정신적인 과중한 부채 의식과 혈통적인 연관성은 결국 그로 하여금 눈물겨운 넌센스를 연출케 하고야 마는 것이다.
혈통’을 자랑해 왔던 우리 사회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독특한 문화 현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적극적인 개방 의식에 의해 수용된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전쟁의 결과로 야기된 것이기에 ‘한민족’에게는 더욱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었다. 잔인하고, 무모한 전쟁이 끝나
혈통을 이어받은 그는 각종 이술(異術)을 지닌 존재이고, 따라서 민중의 의식을 구현하여 줄 수 있는 영웅적 인물로 부각된 것이다. 또한 남성보다도 여성인 박씨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범한 인물로 그린 데에는 가부장제도 하에서 억압되어 살아야 했던 봉건적인 가족제도에서 정신적으로나마 해방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