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토유리코로 바꾸지만 1933년 스파이 사문사건용의로 남편인 켄지가 검거 당한다. 남편의 체포 이후, 미야모토유리코는 옥중의 켄지를 열심히 뒷바라지 하며, 자신도 직접 체포당하거나 집필중지 등을 반복해서 당하는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이러한 경험이 바로 이 작품 「하루하루의 반영 (日々の
아낌없이 빼앗는다 惜みなく愛は奪ふ』(1920)는 본능애(本能愛) 속에서 자아완성의 가능성을 모색한 대표적 평론이다. 그밖에 몇몇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여 인기작가가 되었으나 때마침 밀어닥친 사회주의의 거센 조류 속에서 사상의 동요를 일으켰고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와 정사(情死)했다.
남편이 감옥에 갇혔지만 남편의 행동이 옳다고 믿고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러던 중 쇼도 섬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어떻겠냐는 주위의 권고를 받고 <무청>이라는 작품을 써서 발표했다. 사카에는 이 한 작품으로 작가로 인정받았고, 비평가들은 ‘부엌에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나온’ 작가라고
미야모토유리코, 구라하라 고레히토 등 구(舊) 프롤레타리아 문학가들은 《신 일본문학》에 의존하면서 민주주의 문학운동을 추진했다. 이들 둘 사이에 일어난 <정치와 문학> 논쟁은 종래의 순수문학을 정치 또는 매스컴으로부터 어떻게 지켜 나가느냐 하는 발상에 기초를 두었으며, 그러한 문학
の姉妹(기온의 자매)」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명성을 높인다.
제일영화사가 경영악화를 이유로 문을 닫은 후, ‘신흥키네마’를 거쳐 松竹京都撮影所(쇼치쿠쿄토촬영소)로 옮겨 끊임없는 제작활동을 한다. 1941년에서 1942년에 걸쳐 만든 「元禄忠臣蔵(겐로쿠츄신구라)」의 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