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산성과 가산산성
가산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되어 있으며 1639년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내성을 축조했고, 영조17년에 중성을 숙종 26년에 외성을 각각 상하 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산성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이 되었다고 한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역사적 현장이기도
Ⅰ.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으로 외탁과 내탁 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으로 이루어졌다는 큰 특징이 있다. 이곳 낙안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
Ⅰ. 개요
조선 전기의 중앙 군제(軍制). 1393년(태조 2) 태조는 고려 때의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하여 여기에 종래의 10위군(衛軍)을 중․좌․우군의 3군으로 나누어 귀속시켜 최초의 강력한 중앙군사체제를 갖추었다. 그 후 3군에 속한 10위는 10사(司)로 개편되
행주대첩이 일어난 시기와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덕양산 정상에 지어진 행주산성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 순찰사로 있던 권율 장군이 이치(梨峙)에서 3만 왜군을 막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수원 독산성에 포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총 지휘관이 되어
행주산성전투에서도 목책이 사용되었다.
② 토성(土城)
목책성의 다음 단계로 발전된 형태가 바로 토성이다. 토성은 석성과 함께 우리나라 성곽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른 시기에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축조되었는데 후대에도 석재를 구하기 힘든 지방에서는 토성이 축조되었다. 성(城)이라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