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나말여초의 시대적 배경
신라 中代를 마감하고 하대에 접어들면서 진골귀족들간의 권력 다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혜공왕 때의 대공의 난, 헌덕왕 때의 김헌창의 난, 흥덕왕 사후 일어난 상대등 김규정과 시중 김명의 대립은 불과 3년 사이(836~839) 희강왕․민애왕․신
두품(頭品)에 비하여 자신들을 왕의 골족이라 하여 율령의 신분체계 내에 최고 귀족 신분으로 별도에 위치에 두었다 (골(骨)이란 ‘귀골(貴骨)’등의 용어로 중국에서도 널리 써온 것으로 지금도 뼈대있는 집안 운운의 표현이 남아있다).
골품제가 성립될 초기에는 왕족은 진골신분에 속해있었다. 그
세력들은 진골이 되었다.
골 계층이 아닌 두품 계층의 형성은 신라의 성립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신라는 사로 6촌(村)이 통합하면서 형성된 서라벌(徐羅伐)을 기반으로 두고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신라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사로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사로 6촌의 각 촌은 신라의 성
6)와 후고구려(901-918)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통삼한’의 민족사는 또다시 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즉 후삼국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은 지방 호족세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는 후고려의 기반을 계승한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Ⅱ. 나말여초의 변혁을 주도한 6두품과
6두품출신들이 주를 이룬 문벌귀족이 생겼고, 후엔 무신정변으로 최씨정권시대, 그리고 친원파 권문세족이 등장했다. 문벌귀족을 기준으로 보자면 후의 무인들은 진보세력이고, 그 세력 후에 등장한 권문 세족도 진보세력이라고 말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 으로 논의를 진행해 나가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