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道의 혹세무민이 천주교만이 아니라는 점, 더욱이 중국에서 陸學, 王學, 佛道, 老道의 종류가 있었지만 금령을 설치한 적이 없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천주교의 전파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를 봉쇄했다.
하지만 1791년의 진산사건(진산군에 살던 천주교 신자 윤지충,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
左道亂正律) 조선 시대 유교(儒敎) 이외에 도교나 불교 따위의 다른 종교로써 유교의 가르침과 법도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키거나 나라의 정치를 문란케 하는 일을 뜻함.
을 들이대며 교수형을 언급한 것이다. 이에 같은 훈구파인 김수동은 기양론(技)을 들어 소설저작의 당위성을
左道亂政)의 죄목으로 대구 달성공원에서 처형되었다. 그가 동학을 포교한 지 3년만이었다.
3. 창작배경
동학이 창도된 19세기 중엽은 조선조의 말기로써 사대적인 혼란과 함께, 다양한 시대적 양상이 대두되었던 시기이다. 임진(壬辰)병자(丙子) 양난 이후에 지속적으로 변모의 양상을 보여왔던 조선조
23) 영남지방의 행정 관청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설치되었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바꾸고, 유수사(留守使)를 두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경주가 되었다. 한동안 경주부에 설치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감영(監營)이 1601년(선조 34)에 대구로 이동된 후 경주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등으로 분리와 병합을 반복하다가 1356년(공민왕 5) 충청도를 별도로 두었다. 1391년(공양왕 3) 양광도·교주도·서해도의 일부를 경기좌도(京畿左道)·경기우도(京畿右道)로 편제했다. 조선시대 태조대에 다시 좌·우도를 정했으며, 1413년 군현제(태종 13) 대개편 때 좌·우도를 합해 경기도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