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1. 신라말기(후삼국 시대)의 왕건, 견훤, 궁예
1. 궁예
정치적 감각: 구고구려계 지방 세력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옛날에 신라가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져서 풀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고 말하는 등 고구려 부흥 주
견훤, 양길, 궁예 등의 굵직한 반란세력 등장 ; 고대의 영웅시대 재현
2) 건국신화의 필요성
신라 말의 혼란한 상황을 바로잡아 바람직한 질서를 창조하는 역량이 요구되고, 이미 통치력을 상실하긴 했으나 그동안 명맥을 유지해왔던 신라의 문화의 무게를 대신하고 넘어서기 위한 정
후삼국의 통일과 고려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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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서론
통일신라말기의 모습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
태조의 여러 시책
태조의 정치이념과 사상
고려 통일의 의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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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은 바로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쟁패 과정이었다. 新羅(신라)는 이미 무력해진 데다가 甄萱(견훤)과 弓裔(궁예)의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이와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 안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 안 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Ⅰ. 고려의 역사
9세기 말엽 신라의 사회모순이 격화되고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호족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호족들은 10세기 초에 이르러 견훤(甄萱)의 후백제와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으로 통합되어 신라와 함께 후삼국으로 정립했다. 주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개성
견훤(甄萱)이었는데 신라 말기 혼란한 정치․사회․경제․군사적인 여러 요인으로 이미 불만이 포화된 지방사회는 진성여왕의 즉위를 계기로 전국적인 규모의 농민봉기로 반발하게 된다.
이때의 당왕조는 현종(685~762) 말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 이후, 찬란한 문화로 세계제국으로까지 불리
견훤(甄萱)이 군내(郡內) 병산(甁山)에서 싸울 때 고을 성주인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권행(權幸)이 고을민을 이끌고 태조를 도와 그 공이 컸으므로 부(府)로 승격하고 안동으로 고쳤다(태조 13년:930년). 그 후 영가군(永嘉郡)으로 고쳤다가 성종 14년(995년)에 길주(吉州)로 하였다가 현종 3년(1012년) 안
견훤(甄萱)은 반기를 들고 백제의 유민을 이끌고 완산(지금의 전주)에 근거를 두어 후백제라 스스로 부르고 궁예는 철원에 근거를 두고 도읍을 세워 태봉국이라 자칭했으나 신라의 왕은 이를 제지할 힘이 없었다. 석학 최치원은 나라를 구할만한 제주를 가지고 있음에도 간신들에 밀려 해인사에 근거하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 892년)를, 송악(松岳, 開城)에서는 궁예(弓裔)가 후고구려(後高句麗, 901년)를 건국하여 다시 통일 이전의 양상과 같은 후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후삼국은 궁예의 뒤를 이어 고려(高麗)를 새로이 건국한(918년) 왕건(王建)이 935년에는 신라를, 936년에는 후백제를 병합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