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새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 초기에 암.수키와가 분리되어 제작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부터 기와가 전국 각지로 전파 되었고 도철, 동물, 수목 등을 새긴 막새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수막새를 반와당이라 부르며 수키와 그 끝에 반원형의 드림새(원
Ⅰ. 개요
한국지붕의 미에 대해서는 그동안 지붕선에 논의가 집중되어 왔다. 한국지붕의 참다운 미는 단순한 지붕선의 곡률반경보다도 이러한 지붕들이 각각 높이와 크기에 있어서 변화를 가지면서 서로서로 중첩되어 겹치면서 그 사이 사이에 공간적 여백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건축은
1. 삼국시대 기와
(1)고구려 시대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일찍부터 한민족과의 직접적인 교류로 인해 백제나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반와당 또는 부고막새기와(사다리꼴에 좌우가 수키와 곡선에 맞도록 안으로 둥글려서 위가 넓고 밑이 좁은 형태에 양선(陽線)으로 귀면의 얼굴만을
막새와 암막새까지 새겼으며 막새마다 8엽의 연꽃 문양까지 새겨 넣었다. 이런 예술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 아닐까? 도굴로 인해 지붕돌 여러 곳이 깨져 가슴이 아프다. 인간의 탐욕은 늘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 대한민국의 최고의 미인에게 칼부림을 한 것을 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삼국시대의
기와
CONTENTS
1.고구려 기와
-국내성 도읍기
-한양 천도 이후
2.백제 기와
-한성 도읍기
-웅진 도읍기
-사비 도읍기
3.신라 기와
-평기와
-수막새
백제
중국
고구려
신라
고구려 기와
중국과 인접하여 삼국 중 기와를 가장 먼저 수용
→ 백제와 신라에 영향
주로 통쪽와통을 사용
국내성 도읍기와
얌전한 형상으로 볼 수 있다.
각시탈
l
우리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미소를 꼽는다면 서산 마애 삼존불의 미소 , 막새기와에 새긴 천년의 미소, 미륵반가 사유상의 미소와 함께 하회탈의 미소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하회탈의 웃음은 거칠 것 없이 드러낸 호탕한 웃음으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막새기와의 모양, 밑면의 서까래 등 목조 건축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탑신 각 면 좌우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우주(隅柱)를 새겼으며, 앞과 뒷면에 문비(門扉)를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문고리 두 개씩을 양각하였다. 또한 문비 양쪽에는 각각 사천왕을 새겨 옹호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머리 뒤로
막새라고도 불림.
·토기류·석기류·철기류 및 갑옷편, 그리고 일반 공구들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백제의 대표적 토기라 할 수 있는 삼족토기(三足土器)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또한 서진(西晉 : 266~316)의 전문자기편(錢文磁器片)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 조각.
이 출토되어 몽촌토성의 축조시기를 3세기
막새 기와, 수막새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품들은 경주지역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형태로서,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48년 10월경에 정원(貞原)20년 (804)의 명(銘)이 있는 선림원 동종이 인근의 숯을 굽는 사람들에 의하여 완전한 상태로 출토된 바 있다. 이 범종은 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定林寺址에서 출토된 陶俑, 佛像 그리고 武零王陵 誌石과 “昌王...”銘사리감 등에 쓰여진 書體 등을 북조문화의 영향으로 파악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와당의 사진 자료>
연화문 와당
와당(암막새)
와당(전)
종류별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