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조브라조프가 개입한 결과였다. 베조브라조프는 1901년 한-만 국경지역의 개척을 위한 압록강회사를 설립하고, 만주와 한국에서 광산과 삼림개발을 맡아왔다. 또 압록강 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삼림 채벌권을 명목으로 1903년 4월 21일 용암포를 불법으로 점령 하였다. 만주를 재점령하고 조선에까
베조브라조프인데 그 일행은 압록강 벌목회사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만주지역의 이권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들은 만주 전역을 러시아의 정치․경제적인 세력범위 밑에 둘 것을 결의한다. 당시 러시아의 동북아 정책은 혼란상태에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만주와 조선문제에 관하여 현지
베르 각서,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 1898년 로젠-니시 협정을 통해 兩國은 충돌보다는 현상 유지의 정책을 시행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의화단 사건의 처리과정을 거치며 성격이 변화된다. 의화단 사건의 해결을 위해 열강의 군사력이 직접 중국에 진출하고, 러시아와 일본 역시 직접 군사를 주둔시
러일전쟁과 일본의 대한정책
- 외교와 사상을 중심으로 -
1. 들어가며
러일전쟁은 한국과 만주 지역을 두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벌이던 신경전이 정점에서 표출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두 국가는 전쟁을 벌이면서도 자국 영토 안에서는 피해가 하나도 없었고, 전쟁이 끝난 다음의 전후 처리에
정(丁)자형 진법
스피드의 이점
1. 삼국간섭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중국으로부터 랴오둥반도 획득→러시아의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통한 동북아 진출에 큰 도전
러시아와 프랑스는 동맹을 맺어 같이 행동
독일은 중국내의 현 상태 유지하고자 함
영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자신의 이해에 손실이 없으
1. 들어가기
서구 제국주의의 마수가 드디어 동아시아에까지 그 손길을 미쳤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등과 같은 열강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열강의 침탈에 대한 동아시아 3개 국가 - 청, 일본, 조선 - 의 대응은 각기 달랐다. 청의 경우 무역은
Ⅰ. 러일전쟁의 개요
1904년 2월 8일 일본연합함대의 여 순항 기습으로 발발한 러일전쟁은 일본에 유리한 조건으로 시작 되었다. 기존의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생각은 일본의 군사력을 경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일본의 군사력은 그 당시 국제 정치 환경이 일본에게 유리
Ⅰ. 머리말
1.2차 세계대전은 국제사회에 있어 힘의 논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패권, 강권이 판을 친 시대였다. 특히 일본의 힘은 막강하여 한 때 세계사를 주름잡는 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이러한 힘의 부상은 러일전쟁을 통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러일전쟁은 1904∼1905년에 만주 ·한국 ·동
III. 후쿠자와 유기치의 사상
(1) 민권론자로서의 유기치
후쿠자와 유기치가 쓴 『학문의 권유』는 ꡒ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ꡓ 는 말로 첫 장을 시작한다. 이는 물론 미국의 독립선언문에서 인용한 구절이지만 발상이 신선하여 당시 무언가 변
⒜ 임오군란 (용구 298)
<대내적 문제>
개국 이후 일본과의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문제였다. 급료인 쌀의 지급이 13개월이나 지연된 배경에는 이유가 있었다.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과의 무역이 시작된 이래 일본에의 수출중 80%를 차지하는 것이 쌀이었고, 서울의 쌀 값이 올랐다.
일본에 대해서